2012년에 개봉한 26년은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1980년 오월 광주를 통과해 현재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연출은 조근현 감독이 맡았고 진구·한혜진·임슬옹·배수빈을 비롯한 앙상블이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의 끝에서 마주한 윤리라는 질문을 밀도 있게 전달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제작 단계부터 상징적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투자 난항을 겪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크라우드 펀딩으로 완성되었고 그 과정 자체가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동시대적 약속처럼 기능했습니다. 작품은 특정 인물을 실명으로 호명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는 우회적 지칭을 택해 법적 제약을 돌파하는 동시에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열을 더 보편적 차원에서 사유하게 합니다. 화면은 과장된 멜로드라마를 피하고 냉정한 톤과 절제된 음악으로 인물의 호흡을 따라가며 관객을 사건의 발화점이 아닌 결정의 문턱 위에 세웁니다. 5·18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26년이 흐른 뒤에도 일상에 남은 흔들림과 분노, 체념과 다짐을 쌓아 올려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정치적 구호보다 인간적 서사에 무게를 둔 이 선택 덕분에 26년은 시대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감상평 - 분노를 고함이 아닌 질서로 번역한 영화
26년을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영화가 분노의 에너지를 고함이나 신파로 발산하지 않고 질서로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인물들은 각자의 직업과 상황 속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보디가드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 사격 실력을 지닌 여성, 조직의 논리와 개인의 윤리가 충돌하는 관리자 그리고 상실 이후에 남은 이들의 삶이 얇은 실선처럼 교차합니다. 영화는 이 선들을 서둘러 묶지 않습니다. 대신 묵음과 간격을 길게 잡아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줍니다. 후반부 작전이 가동되기까지 인물들이 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가 장면마다 차곡차곡 증명되어 클라이맥스의 긴장이 폭발이 아닌 필연으로 체감됩니다. 특히 그 사람을 둘러싼 연출은 절제의 미학입니다. 과도한 대사나 과장된 악역 톤을 배제하고 일상의 단면의 모습인 조용한 골프장, 사소한 습관, 비서진의 동선만으로 현실감을 구축합니다. 덕분에 카메라가 인물의 뒷목과 손끝, 시선의 흔들림을 오래 붙잡을 때 관객은 정치적 입장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디까지 응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음악 사용도 절제되어 있습니다. 비극을 부풀리는 현악 대신 낮게 깔린 음향과 침묵이 장면을 붙잡고 배우들의 호흡과 공간의 냉기가 정서를 이끕니다. 상징의 사용 또한 과묵합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타이밍, 엘리베이터의 멈춤, 안전장치가 풀리는 찰나가 이야기의 박동을 대체합니다. 그래서 26년은 정치적 영화로서의 존재감을 가지되 무엇보다 사람의 영화로 남습니다. 기억을 다루는 작품이 지켜야 할 윤리는 소리 지르지 않되 외면하지 말 것을 충실히 지킨 품위 있는 분노의 기록이라고 느꼈습니다.
관람 포인트 - 인물군 앙상블, 공간의 리얼리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타임라인
관람 시 주목할 지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앙상블입니다. 진구는 굳센 외피와 흔들리는 내면을 균형감 있게 잡아내고, 한혜진은 강단과 연약함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캐릭터의 현실성을 부여합니다. 아이돌 출신인 임슬옹은 과장되지 않은 톤으로 말수 적은 청년의 울분을 담아 신인다운 신선함을 보여주며, 배수빈은 조직의 논리와 개인의 윤리 사이에서 멈칫하는 시선으로 이야기의 그늘을 넓힙니다. 상대 역으로 등장하는 베테랑 배우들은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도발하지 않고도 권력의 냉기를 전하는 데 충실해 화면의 온도를 일정하게 낮춰 줍니다.
둘째, 공간의 리얼리티입니다. 사무실·연습장·차고·연회장 등 일상의 장소가 사건의 무대가 됩니다. 현란한 세트나 과장된 미술 대신, 누구나 본 적 있는 카드키, CCTV, 회색 카펫 등의 사물을 이용해 긴장을 발생시키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특히 보안이 겹겹이 걸린 저택의 동선, 엘리베이터와 CCTV 사각지대를 계산하는 구간, 차량의 진입·회전 반경을 미리 맞춰 보는 장면 등은 현실적 작전을 보는 재미를 줍니다.
셋째, 타임라인 설계입니다. 영화는 다수의 시계를 동시에 굴립니다. 각 팀이 각자의 시차와 동선을 지키며 한 점으로 수렴하는 구성은 거대한 액션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휴대전화 진동 하나, 문이 잠기는 소리 하나가 서스펜스의 트리거가 되고 편집은 필요 이상으로 빨라지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박자를 끊어 줍니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캐릭터의 도덕적 선택뿐 아니라 물리적 실행 과정까지 함께 계산하며 몰입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가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든 그 과정에서 관객이 겪는 심리적 동행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입니다.
웹툰 원작을 영화화한 이유
26년이 웹툰에서 영화로 제작된 배경에는 세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강풀의 원작 웹툰은 연재 당시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이미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작품이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의 가상 복수극이라는 과감한 설정과 인간적인 서사 전개는 수많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영화화 시에도 원작 팬층이라는 확실한 관객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둘째, 영화라는 매체의 감각적 재현력은 원작이 전달하려던 메시지를 훨씬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듭니다. 웹툰이 글과 그림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분노, 슬픔, 갈등은 배우의 표정, 목소리, 공간의 공기감, 사운드 디자인 등을 통해 더 입체적으로 전달됩니다. 이는 관객이 단순히 이야기를 아는 것을 넘어 실제로 사건과 인물 옆에 서 있는 듯한 몰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셋째, 영화화는 사회적 기억의 확산이라는 목적과 맞닿아 있습니다. 웹툰이 온라인 독자층에 한정되었다면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적 공간을 통해 세대와 지역을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5·18을 직접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같은 상영관에서 한 서사를 공유함으로써 세대 간 기억과 인식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26년의 영화화는 검증된 원작 스토리, 영화만의 감각적 표현력 그리고 사회적 의미 확산이라는 세 가지 이유가 맞물린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